호모 데우스 - 유발 하라리
p36. 테러범들은 도자기 가게를 부수려는 파리와 같다. 파리는 힘이 없어서 찻잔 한 개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서 황소를 찾아내 그 귓속에 들어가 윙윙거리기 시작한다. 황소는 공포와 화를 참지 못해 도자기 가게를 부순다. 이것이 지난 100년 동안 중동에서 일어난 일이다.
p46. 20세기에 기대수명이 40세에서 70세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으니, 21세기에는 적어도 그 두 배인 150세까지는 거뜬하지 않을까. 불멸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그정도로도 인간사회가 혁명적으로 바뀔 것이다.
p48. 사실상 지금까지 현대 의학은 인간의 자연수명을 단 1년도 연장하지 못했다. 의학은 때이른 죽음에서 우리를 구하고 우리가 주어진 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다. 그러나 우리가 암,당뇨병 그리고 그밖의 주요 사망 원인들을 극복했다 해도, 그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90세까지 산다는 뜻일 뿐이다. 그 정도로는 500세는 고사하고 150세까지 살기에도 충분치 않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체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 및 과정들을 재설계할 필요가 있고, 인체 기관과 조직을 재생하는 방법을 알아내야 할 것이다.
p57. 게다가 어제의 비극을 극복했다고 해서 오늘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행복해지는 것이 절대적 고통을 없애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 중세시대의 굶주린 농부를 기쁘게 하려면 빵 한 조각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돈은 많이 벌지만 따분하고 과체중인 엔지니어를 기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p81. 어디까지가 치료이고 어디부터가 성능 향상인지 명확한 선은 없다. 의학은 언제나 표준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을 구하는 일로 출발하지만, 그다음에는 같은 도구와 노하우로 표준을 뛰어넘을 수 있다. 비아그라는 원래 혈압 치료제로 개발되었다. 그런데 발기부전에도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파이저 사로서는 놀랍고도 기쁜 일이었다. 수백만 명의 남성들이 그 약을 먹고 정상적인 성 기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성 기능이 정상인 남성들이 표준을 능가해 전에 경험하지 못한 성 능력을 얻기 위해 같은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p101. 1부에서는 무엇이 우리 종을 이처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와 여타 동물들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기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동물이다. 인간과 동물들의 관계는 미래에 전개될 초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예측하는 데 가장 좋은 모델이기 때문이다. 초인적 지능을 지닌 사이보그가 살과 피를 지닌 보통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동물 사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된다.
2부에서는 1부의 결론을 토대로 호모 사피엔스가 지난 천 년 동안 창조한 기이한 세계와 우리를 현재의 교차로로 데려온 길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 3부에서는 다시 21세기 초로 돌아와 인류와 인본주의에 대한 훨씬 더 깊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곤경과 우리에게 가능한 미래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p102. 그동안의 역사에서 많은 종교,제국,문화가 흥하고 망했다. 그러한 격변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본주의는 300년 동안 세계를 지배했는데, 30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파라오가 이집트를 3,000년 동안 지배했고, 교황은 유럽을 천 년 동안 지배했다. 당신이 람세스 2세 시대의 이집트인에게 언젠가 파라오가 사라질 거라고 말한다면 그는 아연실색해서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파라오 없이 어떻게 삽니까? 누가 질서와 평화,정의를 보장합니까?"
후대에 와서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들은 파라오의 몰락과 신의 죽음을 모두 긍적적인 변화로 생각한다. 어쩌면 인본주의의 붕괴도 결국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본래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상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p112.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동물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열등한 존재하고 생각한다. 가장 오래된 전통들 조차 수렵채집 시대가 끝나고 수천 년이 지난 뒤에 생겼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구약성경>>은 기원전 1000년대에 쓰였고, <<구약성경>>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은 기원전 2000년대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런데 수렵채집인들의 시대가 중동에서는 적어도 7,000년은 더 일찍 끝났다.
p151. 진화론이 영혼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우리가 말하는 '영혼'이 분리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그런 실체는 단계적 진화를 통해 생길 수 없다. 자연선택을 통해 인간의 눈이 만들어진 것은 눈이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혼에는 부분이 없다. 만일 사피엔스의 영혼이 에렉투스의 영혼에서 단계적으로 진화했다면 그 단계들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사피엔스 영혼의 어떤 부분이 에렉투스보다 더 발달했을까? 하지만 영혼에는 부분이 없다.
p154. 그러면 동물은 어떨까?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을까? 그들도 주관적인 경험을 할까?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말에게 일을 시켜도 괜찮을까? 앞서 지적했듯이, 현재 생명과학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포유류와 조류, 적어도 일부 파충류와 어류가 감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최신 이론들은 감각과 감정이 데이터를 처리하는 생화학적 알고리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로봇과 컴퓨터가 주관적 경험 없이 데이터를 처리하니 동물들도 똑같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인간의 경우도 뇌 안의 많은 감각회로와 감정회로들이 데이터를 처리해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유발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동물들에게 있다고 생각되는 감각과 감정은 주관적 경험이 아니라 무의식적 알고리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p156. 뇌가 800억 개 이상의 뉴런들이 수많은 그물처럼 연결된 매우 복잡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수백억 개 뉴런이 수백억 개 전기신호를 주고받을 때 주관적 경험들이 일어난다. 각각의 전기신호를 보내고 받는 것은 단순한 생화학적 현상일지 몰라도, 이 모든 신호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훨씬 더 복잡한 어떤 것을 창조한다.
p171. 오늘날 과학적 정설에 따르면,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내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활동의 결과이고, 따라서 '실제'세계와 구별이 불가능한 완전한 가상세계를 위조하는 것이 이론상으로 가능하다.
p172. 튜링 테스트는 컴퓨터 시대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이 1950년대에 발명한 것이다. 튜링은 영국에서 동성애가 불법이던 시절에 동성애자였다. 튜링 테스트는 1950년 영국에서 모든 동성애자 남성이 받아야 했던 일상적인 테스트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튜링은 개인적 경험을 통해, 내가 실제로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임을 깨달았다. 튜링은 미래에 컴퓨터가 1950년대의 동성애자처럼 될 거라고 내다보았다. 컴퓨터가 실제로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일 것이다.
p175. 과학계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에 부응해, 2015년 5월 뉴질랜드는 세계 최초로 동물이 감응적 존재임을 법적으로 인정한 국가가 되었다. 이때 뉴질랜드는 동물복지에 관한 수정조항을 통과시켰다.
p197. 연구조사에 따르면 사피엔스는 150명 이상의 사람들과는 (적대적인든 우호적이든)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한다. 어잿든 인간이 대규모협력 네트워크를 조직할 수 있는 비결이 친밀한 관계는 아니다.
p204.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재가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이며 제3의 옵션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것이 자신의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고 확신하면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라는 결론으로 도약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면, 돈이 세상을 움직인다면, 민족주의가 전쟁을 일으키고 제국을 만든다면, 이런 것들은 내 주관적 느낌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돈,국가는 객관적 실재여야 한다. 하지만 실재에는 제3의 층위가 존재한다. 그것은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상호주관적 실재들은 개개인의 믿음과 느낌보다는 여러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의존한다.
p212. 사피엔스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그들만이 상호주관적 의미망을 엮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동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법,힘,실체,장소로 이루어진 그물이다. 이런 그물은 인간만이 십자군,사회주의 혁명,인권운동을 조직할 수 있게 한다. 다른 동물들도 아마 다양한 것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리고 고양이들은 쥐처럼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만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본 적도 냄새를 맡은 적도 맛본 적도 없는 것(예컨대 미국달러,구글기업,유럽연합 같은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사피엔스만이 그런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사피엔스는 언어를 사용해 완전히 새로운 실재들을 창조한다. 지난 7만 년 동안 사피엔스가 발명한 상호주관적 실재들은 점점 막강해졌고, 오늘날 이들이 세계를 지배한다. 다른 어떤 동물들도 우리에게 맞서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영혼이나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기 위해 필요한 상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p311. 20년을 함께한 배우자가 만족시켜주지 못한 감정적,성적 욕구를 외도로 풀 수 있다면, 게다가 새로운 연인이 자상하고 열정적인 데다 상대방의 요구를 잘 헤아린다면, 왜 그것을 즐기면 안 되는가?
당신은 그 일과 관련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 여성과 연인이야 당연히 서로의 품안에서 행복하겠지만, 작자의 배우자들은 아마 한동안 끔찍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그 일로 이혼이라도 하게 되면, 자식들은 수십 년 동안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설령 외도가 발각되지 않더라도 엄청난 긴장이 따를 것이고, 따라서 소외감과 반감을 키우게 될 것이다.
인본주의 윤리에서 가장 흥미로운 논의는 외도처럼 인간의 감정이 충돌하는 상황에 대한 것이다. 똑같은 행동을 어떤 사람은 좋게 느끼고 다른 사람은 나쁘게 느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 감정 가운데 어느 쪽이 중요한지 어떻게 결정할까? 두 연인의 좋은 감정이 그들의 배우자와 자녀들이 느끼는 나쁜 감정보다 더 가치 있을까? 현대인은 외도에 대해 저마다 생각이 다르지만, 어떤 입장을 취하든 성경과 신의 계명을 내세우기보다는 인간의 감정을 내세워 그 일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인본주의는 어떤 일이 누군가에게 나쁜 감정을 일으킬 경우에만 나쁘다고 가르쳐왔다.
p334. <<오즈마법사>>에서 양철 나무꾼은 오즈에 도착하면 위대한 마법사가 자신에게 심장을 줄 거라고 생각하며 도로시와 그 친구들과 함께 노란 벽돌길을 따라 겉는다. 마찬가지로 허수아비는 뇌를 원하고 사자는 용기를 원한다. 하지만 여행이 끝날 무렵 그들은 위대한 마법사가 실은 사기꾼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하는데, 바로 그들이 바라는 모든 것이 이미 그들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감정과 지혜와 용기를 갖고자 한다면 신과 같은 마법사는 필요 없다. 그저 노란 벽돌길을 따라 걸으며 도중에 겪는 경험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p365. 1970년 세계에는 130개의 독립국가가 있었지만, 그중 30개 국가만 자유주의 국가였고, 대부분이 유럽 북서쪽 구석에 몰려 있었다. 인도는 제3세계 주요 국가들 가운데 독립을 얻은 이후 계속 자유주의의 길을 걸은 유일한 국가였지만, 인도조차 서방 세력권과 거리를 두고 소련 쪽으로 기울었다.
p391. 우리는 뇌 영상을 이용해 사람의 욕망과 결정을 본인이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예측할 수 있다. 어떤 실험에서 사람들을 거대한 뇌 스캐너에 넣고, 양손에 스위치를 하나씩 쥐게 했다. 그리고 내킬 때마다 두 스위치 중 하나를 누르라고 했다. 피실험자가 실제로 행동을 하기도 전에, 심지어 자신의 의향을 자각하기도 전에 과학자들은 피실험자의 뇌 신경 활성을 보고 어떤 스위치를 누를지 예측할 수 있었다. 피실험자가 자신의 선택을 인지하기 영 점 몇 초 내지 몇 초 전에 피실험자의 결정을 알려주는 뇌신경 활성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른쪽 스위치나 왼쪽 스위치를 우르는 결정은 피실험자의 선택을 반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자유이지의 존재를 믿는 것은 잘못된 논리 때문일 것이다. 어떤 생화학적 연쇄반응이 오른쪽 스위치를 누르고 싶게 만들 때 나는 실제로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싶다고 느낀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나는 정말로 그 버튼을 누르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그 스위치를 누르고 싶다면 그 소망은 내 선택'이라는 결론으로 논리적 비약을 감행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내 욕망을 선택하지 않는다. 단지 그 욕망을 느끼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유의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은 과학자들 중에서조차 낡은 신학적 개념들을 계속 사용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이슬람교,유대교 학자들은 수백 년 동안 영혼과 의지의 관계에 대해 논쟁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영혼이라 불리는 내적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진정한 '나'라고 추정했다. 또한 그들은 내 자아가 옷,자동차,집을 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욕망을 소유한다고 주장했다.
p404. 이 찬물 실험은 매우 간단하지만, 그 함의는 자유주의 세계관의 근간을 흔든다. 이 실험은 적어도 두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폭로한다. 바로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이다. 경험하는 자아는 순간순간의 의식이다. 경험하는 자아에게 찬물 실험의 '긴' 부분이 더 나빴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처음 60초 동안 14도의 물을 경험하는데, 이것은 '짧은' 부분에서 경험한 것만큼이나 불쾌한 자극이다. 그런 다음 15도의 물을 30초간 더 견뎌야 하는데, 이 부분은 아까보다는 덜 불쾌하지만 쾌감과는 여전히 거리가 먼 느낌이다. 경험하는 자아는 매우 불쾌한 경험에 약간 불쾌한 경험을 더하여 일화 전체를 더 괜찮은 경험으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경험하는 자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경험하는 자아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참조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기억을 끄집어내고 이야기를 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것은 모두 우리 안에 있는 매우 다른 실체인 '이야기하는 자아'의 독단이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는 않고, 대개 중요한 순간과 최종결과만을 이용해 이야기를 엮는다. 경험 전체의 가치는 중요한 순간과 결말의 평균으로 결정된다. 경험을 평가할 때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의 지속시간은 고려하지 않고 '정점-결말 법칙'을 채택한다. 다시 말해 이야기하는 자아는 정점과 마지막 순간만 기억해 둘의 평균으로 경험 전체를 평가하는 것이다.
p410. 게다가 때때로 경험하는 자아는 이야기하는 자아가 세운 최고의 계획마저 방해할 정도로 강력하자. 예컨대 나는 새해를 맞아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매일 운동하기로 결심한다. 이런 중대한 결정은 이야기하는 자아의 독단이다. 하지만 막상 운동할 시간이 되면 경험하는 자아가 우세해진다. 나는 운동하러 가고 싶지 않아서 피자를 주문한 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켠다.
p471. 머지않아 당신이 책을 읽는 동안 책도 당신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읽은 내용의 대부분을 금세 잊을 테지만, 아마존은 하나도 잊지 않을 것이다.
p476. 과학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20세기의 수많은 획기적인 의학 치료들도 부자들이 먼저 시작했지만 결국 인류 전체가 혜택을 보았고, 그런 치료들은 사회적 격차를 넓히기보다 좁히는 데 일조했다고 대답한다. 예를 들어 백신과 항생제의 경우 처음에는 서구 국가의 상위 계급에만 혜택이 돌아갔지만 지금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혜택을 누린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21세기에도 그대로 반복될 거라는 기대는, 희망적 사고에 그칠지도 모른다. 첫째 의학은 중대한 개념적 혁명을 겪고 있는 중이다. 20세기에 의학의 목표는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 의학의 목표는 건강한 사람의 성능을 높이는 쪽(업그레이드) 으로 가고 있다. 둘째로, 20세기 의학의 혜택이 대중에게 돌아간 것은 20세기가 대중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20세기 군대는 수백만 명의 건강한 군인들을 필요로 했고, 20세기 경제는 수백만 명의 건강한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룬 가장 위대한 의학적 성취는 대중 위생시설의 보급,예방접종 운동, 유행병 극복이었다. 하지만 대중의 시대는 끝나고, 더불어 대중의학의 시대도 끝날 것이다. 인간 병사와 노동자들이 알고리즘에 밀려나면, 적어도 일부 엘리트 집단들은 쓸모없는 가난뱅이 대중에게 더 나은 건강,아니 표준적인 건강조차 제공할 필요가 없으며, 차라리 표준을 능가하는 소수의 초인간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라는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p479. 20세기 인간의 거대한 프로젝트 (기아,역병,전쟁을 극복하는 것)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풍요,건강,평화의 보편적 표준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21세기의 새로운 프로젝트 (불멸,행복,신성을 얻는 것) 역시 포부는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들의 목표는 기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능가하는 것이라서, 새로운 초인간 계급을 탄생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런 초인간들은 자유주의의 근본 바탕을 포기하고 보통 인간을 19세기 유럽인이 아프리카인을 대한 것처럼 대할 것이다.
p482. 7만년 전 인지혁명은 사피엔스의 마음을 탈바꿈시켜 별 볼일 없던 아프리카의 한 유인원을 세상의 지배자로 만들었다. 우리가 아는 한, 지구를 뒤흔든 이 혁명은 사피엔스의 유전자에 일어난 몇 가지 작은 변화와 사피엔스의 뇌 배선이 약간 바뀐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게놈에 추가로 몇 가지 변화가 더 일어나고 뇌 배선이 한 번 더 바뀐다면 두 번째 인지혁명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기술 인본주의의 생각이다. 두 번재 인지혁명으로 탄생할 호모 데우스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영역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은하계의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
p535. 그 다음에 도착한 인본주의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했다. "인간이 신을 발명하고, 성경을 쓰고, 그런 다음 그것을 수천 가지 방식으로 해석했다. 그러니 모든 진리의 원천은 인간이다. 영감을 주는 인간 창조물로서 성경을 읽을 수 있지만 반드시 읽어야 하는것은 아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딜레마에 직면한다면,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고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면 된다."
p536. 성격을 읽을 때 당신은 고대 예루살렘에 살았던 사제와 랍비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귀 기울일 때 당신은 오랜 진화를 통해 개발되어 자연선택의 엄격한 품질검사를 통과한 알고리즘을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더 이상 감정이 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알고리즘이 아닐 것이다. 인본주의의 계명이 "네 감정에 귀 기울여라!"였다면, 데이터교의 계명은 "알고리즘에 귀 기울여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