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수업 - 한동일
p56. 저는 어려서부터 학교와 집에서 "공부해서 남주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하지 못했던 대답을 지금은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할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일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착취당하며 사회구조적으로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는 무신경해요.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모른 척하기 일쑤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감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p63.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한다. 이미 강을 건너 쓸모없어진 배를 아깝다고 지고 간다면 얼마나 거추장스럽겠습니까?
p73. 학생이 자발적으로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학생의 개인적인 성장이지 타인과의.비교가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교육의 상대평가라는 평가 시스템은 철저한 비교를 통해 학생들을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고 점수를 매깁니다. 이 점은 대학이라고 해서 게 없고 대부분의 기업체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쟁 구도는 스스로 동기를 찾고 발전시켜 공부하기보다는 다른 학생들과의 경쟁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뿐만아니라 개인적인 성장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로 학생들을 쉽게 좌절하게 만들고 의욕을 잃게 합니다.
유럽대학의 평가방식은 학교에 따라, 교수 재량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절대평가로 이루어집니다. 특히 라틴어로 성적을 매기는 표현을 주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우등/우수/우등/좋음.잘했음
평가 언어가 모두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잘한다/보통이다/못한다'식의 단정적이고 닫힌 구분이 아니라 '잘한다'라는 연속적인 스펙트럼 속에 학생을 놓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겁니다. 이렇게 긍정적이 스펙트럼 위에서라면 학생들은 남과 비교해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발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남보다' 잘하는 것이 아닌 '전보다' 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p77. 공부에 지치고 세상이 자신을 보잘것없게 만들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더라도 언제나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는 케루빔 천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며 세상의 기준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다보면 초라해지기 쉬워요. 하지만 어떤 상황에 처하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일으켜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에는 그런 사람이 한 번도 초라해져본 적 없는 사람보다 타인에게 더 공감하고 진심으로 그를 위로할 수 있는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p81. 학생들도 대학생활 동안 맹목적으로 어떤 목표부터 세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을 우선해야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세심하게 관찰해야 하죠. 봄철의 아지랑이가 무심히 길을 걸을 때는 보이지 않고 멈춰 서서 유심히 관찰해야 보이듯이, 내 마음속의 아지랑이도 스스로를 유심히 들여다봐야 볼 수 있는 것이죠.
p93. 로마서는 바오로(바울)가 로마 신자들에게 쓴 편지인데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분들을 위해 간략히 바오로라는 인물에 대해서 먼저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사울'로 그는 유대인이었고 당대 유명한 유대인 랍비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게다가 엄격한 바리사이파이자 그리스도교의 박해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를 체포하러 가던 중에 예수를 만나는 특별한 체험을하고 완전히 회심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이름을 '사울'에서 '바오로'로 바꾼 뒤 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돌며 선교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유대인들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그가 유대교를 비방하고 선교여행 중에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는 것이 이유였어요. 율법을 중요시 했던 유대교들의 입장에서 그는 배신자와 같았고, 그들은 군중을 선동해 바오로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군인들은 이 사태가 폭동으로 번질까봐 두려워 바오로를 체포해 급히 카이사리아로 호송합니다. 카이사리아에서 2년 가까이 보낸 는 로마의 시민권자로서 황제에게 상소를 했고, 그 후에 로마로 보내지는데요, 로마서는 바오로가 로마에 보내지기 전에 쓴 편지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고대 및 현대의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p96. 또 로마서는 바오로가 그리스도교의 기본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조상이나 모세의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의화 (신에 대한 믿음과 신의 은혜를 통해 죄인이 의로운 상태로 되는 일) 되는 것에서부터 바오로의 모든 주장이 시작됩니다. 일단 이 점이 올바로 이해되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장벽은 사라질 겁니다. 믿음이란 마음의 문제지 형통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개인적인 배경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환영받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의 유대인들처럼 성서를 잘 알고 있다면 문제될 게 없겠지만 믿음은 없고 성격 지식만 풍부하다면 오히려 그 지식은 쓸모없을 뿐더러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p110. 그리고 사실 성경이 예수의 모든 일상을 다 적어놓은 것도 아닙니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 21장 25절에서도 "예수께서는 이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라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가르침과 그분의 행적을 담고 있는 성경이란, 그 해석에 있어 절대적인 기준은 흔들림이 없어야겠지만 성경에 예수의 모든 가르침이 기록되지 않았거나, 예수의 본 의도가 온전히 담기지 않았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인간사의 세부적인 예수의 원 의도가 무엇인지 묻고 그에 따라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할 겁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와 반대인 것 같아요. 많은 경우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의는 신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라는 탄식이 우리 시대에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p128. 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 - 토마스 아 켐피스, 독일의 수도자이자 종교 사상가
p227. 지금은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랍입니까?"라고 묻지만, 과거에는 '어느 민족, 어느 백성, 어느 도시 사람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이유는 '국가', '나라'라는 개념이 15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 개념을 거쳐 근대에 와서야 생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누구의 민족, 백성'인지, 즉 어느 영주의 소속인지를 따지기도 했어요. 이는 근대에 종교 자유의 원칙을 규정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회의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 평화 회의는 예속민(국민)들에게 영주가 믿는 종교를 따를 의무를 천명한 겁니다. 이를 '영주의 신앙 결정권'이라고 하는데 '영주에게 속한 영토는 그의 종교를 따르라는 원칙이 제정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영주가 천주교 신자이면 예속민들은 천주교 신앙을, 영주가 개신교 신자이면 개신교 신앙을 따라야만 했다는 말입니다. 이는 오늘날처럼 독립된 '개인'의 개념이 생기기 전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개인'이라는 개념은 근대 이후 인권 개념의 신장과 함께 나타났으니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