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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고영남 2019. 7. 10. 10:03

 

얼마 전에 위워크 을지로점에서 북클럽 도서로 정했던 '그리스인 조르바'와 같은 느낌의 어려운 책이다. 진도가 잘 안나가기도 했고 소설 내용의 의미가 뭔지를 잘 모르겠는건지 아니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을 했는지 그리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주변 사람들은 모두 대단한 책이라고 좋은 평가 일색이다.

*책을 발간한 1890년대 역사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 청일전쟁 선포

1895년 명성황후 피살(을미사변)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하계올림픽 개최

1897년 대한제국 건국

 p17. 바질 홀워드는 헨리 경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감정을 실어 그린 모든 초상화는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초상화지 화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초상화가 아니야. 모델이 된 그 사람은 단순히 하나의 우연이고 계기가 될 뿐이지. 화가의 손에 의해 드러나는 사람은 그가 아니야. 색칠한 캔버스 위에 화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내가 그 그림을 전시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혹여 내가 그 그림 속에 내 영혼의 비밀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겁이 나기 때문이야.>

p34. 헨리경, 정말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칩니까? 바질이 말한 대로요? 그레이 씨, 좋은 영향이란 건 없어요. 모든 영향이란 부도덕한 겁니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 부도덕한 것이오. 이유가 뭐죠? 어떤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신의 영혼을 주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자신의 정열로 타오르는 게 아닌 겁니다. 그의 덕목도 그에게는 실감나게 다가오지도 않을 것이고, 죄악이라는게 있다면 그의 죄악도 사실은 그의 것이 아니라 빌려 온 셈이 되는 거지요.

p35. 인생의 목적은 자기의 발전이오.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실현시키는 것, 그것이 이곳에 있는 우리들의 존재 목적이지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충만하고 온전하게 살려면 모든 감정에 형태를 부여해야 하고, 모든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꿈을 실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어요. 세상이 그와 같은 아주 신선한 환희의 자극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중세주의의 그 모든 해악을 잊고 그리스적인 이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거지요.

p36. 유혹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그 유혹에 굴복하는 겁니다. 유혹에 저항해 보시오. 그러면 당신의 영혼은 그 스스로가 금지시킨 것에 대한 갈망과 기괴한 영혼의 법칙에 의해 불법의 흉측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한 욕망으로 병들어 버릴 것이오. 거의 10분 동안 도리언은 입은 약간 벌린 채, 눈에서는 전에 없던 광채를 내비치며 단 위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전에는 느끼지 못한 어떤 새로운 힘이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대는것을 어렴풋이 의식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힘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느꼈다.

p37. 그렇다. 어린시절에는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한다. 문득 그에게 인생이라는 것이 불처럼 타오르는 빛나는 색채로 다가왔다. 불길속을 걸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왜 전에는 이것을 알지 못했을까?

p40. 그러면 바질이 당신 얼굴을 그리지 못할 거요. 햇빛에 태워서는 안 되죠. 보기 흉해집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도리어 그레이는 정원 끝자락에 놓인 의자에 앉으면서 웃음이 담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에게는 그게 아주 중요한 것이오, 그레이씨. 왜죠? 그건 당신이 가장 멋진 청춘을 지녔기 때문이지요. 청춘이라는 게 우리가 지니고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단 하나의 것이니까.

p47. 얼마나 슬픈 일인가! 도리언 그레이가 자기 초상화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슬픈가! 나는 늙어 무섭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하겠지. 그런데 이 그림은 항상 젊은 상태로 남을 것이 아닌가. 6월의 오늘보다 더 늙지 않을 게 분명한데..., 거꾸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영원히 젊은 상태로 있고, 그림이 늙어 간다면! 그걸 위해서라면-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줄 텐데! 내 영혼이라도 내줄 용의가 있는데!

p78. 절대 결혼하지 말게, 도리언. 남자는 지쳐서 결혼하는 거고, 여자는 호기심 때문에 결혼을 하지. 결국 둘 다 실망하게 돼.

p86.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먼저 늘 자신을 속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끝날 땐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으로 끝나지. 그게 바로 이 세상이 로맨스라고 부르는 것일세.

p89. 오늘 밤에 그녀는 이모젠이 됩니다. 그리고 내일 밤엔 줄리엣이 될 거고요. 그럼 그녀가 시빌 베인이 되는 것은 언젠가? 그럴 때는 없을 겁니다.

p121. 나는 낙관주의를 대단히 경멸해. 망가진 삶? 어느 삶이든 성장이 멈출 수는 있지만 망가지지는 않지. 자연을 훼손하고 싶으면 대대적으로 자연에 손을 대면 되는 거야. 결혼, 정말 바보 같은 짓이지. 세상에는 결혼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남녀 간의 결합이 많거든. 나는 그런 결합을 기꺼이 장려하겠네.

p123. 그녀는 정말 타고난 예술가예요. 그녀에게 완전히 매료된 채 전 음침한 객석에 앉아 있었지요. 제가 19세기 런던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어요. 이를테면 아무도 보지못한 숲 속으로 내 사랑과 함께 들어간 느낌, 바로 그랬어요. 공연이 끝난 뒤 전 무대 뒤로 가서 그녀와 얘기를 했어요. 그렇게 함께 앉아 있는데 글쎄, 그녀 눈에 전에는 보지 못했던 표정이 피어나는 거예요. 제 입술이 그녀를 향해 움직였어요.... 저도 이제 1년 좀 못 지나 성인이 되는데요, 뭘. 그러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잖아요. 바질, 저에게도 권리가 있지 않나요?

p145. 그는 의자에 몸을 던지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불현듯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초상화가 완성되던 날 바질 홀워드의 화실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그 말을 한 자도 빼먹지 않고 기억했다. 그것은 그 자신은 젊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대신 초상화가 늙어 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망이었다. 자신의 아름다움은 하나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고 화폭에 그려진 자신의 얼굴이 그의 격정과 죄의 무게를 감당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었고, 그림 속 얼굴이 고통과 많은 생각으로 생긴 주름을 떠안고 자신은 자의식이 강한 청년의 섬세한 청순함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했으면 좋겠다는 바랍니었다. 당연히 그런 그의 소망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 그림이 있고, 더욱이 입가에 잔인함의 기운이 나나타고 있지 않은가. 잔인함! 그가 잔인했던가? 그건 여자의 잘못이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는 위대한 예술가인 그녀의 모습을 꿈꿨고, 그녀가 위대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녀에게 사랑을 바친것이었다.

p147. 그러나 초상화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어딘가 상처 입은 것 같은 얼굴에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지켜 보고 있었다. 금색 머리칼이 이른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그 파란 눈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불현듯 한없는 연민의 정이 온몸에 엄습해 왔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림 속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연민이었다. 초상화는 이미 변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변할 것이 분명했다... 그가 죄를 저지를 때마다 더러운 얼룩이 생겨나 아픔다움을 훼손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변하든 변하지 않든 그에게 그의  초상화는 자신의 양심을 나타내는 가시적인 상징이었다. 유혹도 뿌리칠 것이다. 헨리 경도 더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시 시빌 베인에게 돌아가 그녀를 바로잡아 주고 그녀와 결혼해서 다시 사랑하도록 노력하리라. 

p157. <스탠더드>지에서 봤는데 그 아가씨 열일곱이라더군.

p165. 하지만 해리, 제가 초췌해지고 나이 들고 쭈글쭈글해지면요? 그땐 어떻게 되는 거죠?

p167.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그녀의 표정과 매력 넘치는 별난 버릇들, 그리고 수줍어 하며 가볍게 떨던 그녀의 우아함을 떠올리자 그의 눈에 눈물이 솟았다. 황급리 눈물을 닦은 그는 다시 초상화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이제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느꼈다. 인생이 - 인생이, 그리고 인생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그의 호기심이- 이미 그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렸다. 영원한 젊음, 다함이 없는 열정, 은밀하게 찾아오는 쾌락, 미친 듯하 기쁨과 거침없는 죄악, 그는 이 모든 것을 다 누려야했다. 그리고 그의 불명예의 모든 짐은 초상화가 대신 짊어지고 가야 했다. 이것이 선택의 전부였다.

p172. 바질, 저는 해리에게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마침내 도리언이 말문을 열었다. 당신한테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받았죠. 당신은 저에게 공허한 것만 가르쳤잖아요. 그래서 벌을 받아야 한다면 달게 받겠네. 도리언. 언제라도 받겠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바질. 도리언이 홀워드를 향해 돌아서며 소리쳤다. 뭘 원하시는지 모르겠단 말예요. 대체 원하시는 게 뭐죠? 내가 초상화를 그려 줬던 그 도리언 그레이를 원하네. 홀워드가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p180. 도리언.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순간부터 자네의 독특한 개성이 나에게 아주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네. 난 자네에게 압도당하고 말았어, 영혼이고 머리고 힘까지 모두. 나에게 자네는 어떤 멋진 꿈처럼 우리 예술가들의 기억 속으로 떠나지 않는 어떤 보이지 않는 이상적인 존재가 가시적으로 현현한 그런 존재가 되었다네. 그래서 내가 자네를 숭배하게 되었지. 자네가 다른 사람과 말을 할 때면 질투를 느끼기도 했어. 자네를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게지. 내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오로지 자네와 함께 있을 때 뿐이었어. 자네가 내 곁을 떠나 있을 때에도 자네는 늘 내 예술 속에서 자리하고 있어 내 곁에 있었던 셈이지.

p201. 초상화 앞에 거울을 들고 서서 캔버스의 그 사악하게 늙어 가는 얼굴을 보고 난 다음엔 반짝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젊은 얼굴을 보곤 했다. 극단에 가까운 이러한 대조가 그에게 쾌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더욱 빠져들었고 자기 영혼의 타락에도 점점 더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p215. 그는 아름답고 훌륭한 사물들을 시간이 어떻게 파괴하고 몰락케 했는지 생각하면서 슬픔에 젖곤 했다. 어잿든 그는 그런 파괴와 몰락을 피하지 않았는가. 여름이 지나고 또 그다음 여름이 지나고, 노란 수선화가 피었다 지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고, 공포의 밤이 그 치욕의 이야기를 반복했지만 도리어 그레이는 변하지 않았다. 어느 겨울도 그의 얼굴에 손상을 입히지 않았으며, 꽃 처럼 활짝 피어난 그의 표전을 더럽히지 않았다.

p223. 불성실함이 정말 그렇게 나쁜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개성을 증대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그가 보기에 인간이란 수많은 삶과 감흥을 지닌 존재고, 그 안에 사상과 정열의 여러 진기한 유산을 담지하고 있고, 그 육신조차도 망자들이 지녔던 기괴한 질병으로더러워진, 여러 모양의 복잡다단한 존재였다.

p220.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 그는 더는 영국을 떠나 있는 게 힘들다고 느꼈다. 그래서 헨리 경과 공동으로 사용하던 트루빌에 있는 빌라뿐 아니라 그들이 여러 차례 같이 겨울을 보내던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 있는 성벽 안의 하얀 집도 포기했다. 자기 삶의 한 부분이 된 그 초상화와 떨어지는 게 싫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방 문에 정교하게 빗장을 설치했음에도 그가 없는 동안 누군가가 그 방에 들어갈까 두려웠기 때문이엇다.

p230. 도리언 그레이는 책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그렇게 책에 빠져 있을 때 그는 단순히 악을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양식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p231. 그날은 그이 서른여덟번째 생일 전날인 11월9일이었다.

p326. 무로론 결혼 생활은 습관에 불과해. 그것도 나쁜 습관이지.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가장 나쁜 습관이라도 그걸 잃고 나면 후회를 하는게 보통이야. 어쩌면 나쁜 습관을 버리고 나면 더 애석해할 걸세. 그 나쁜 습관들이 인간 성격에 가장 필수적인 부분이니까 그런 거야.

p332. 나이 든 사람의 비극은 그 사람이 나이가 들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여전히 젊다는 데 있네.

p339. 그리고 바질 홀워드의 죽음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살아 있으면서 죽은 그 자신의 영혼이었다. 바질은 그의 삶을 망쳐 버린 초상화를 그린 사람이었다. 그 점을 그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p340. 그는 문득 잠긴 방 안에 있는 초상화가 또 변한 것은 아닌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예전처럼 그렇게 섬뜩한 모습은 아닐 것 같았다. 그의 삶이 깨끗한 삶이 되면 초상화도 그 얼굴에서 사악한 격정의 모든 자취를 다 지원 버리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미 그 사악함의 흔적들이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올라가서 보고 싶었다..... 그리고 초상화를 가린 자주색 천을 끌어내렸다. 순간 고통과 분노의 외마디 비명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눈에 교활함의 표정이 실려 있고, 입가에 위선의 주름살이 그려진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초상화는 여전히 역겨웠다. 

p342. 그러나 살인. 평생 그를 쫓아다닐 것이 아닌가? 늘 과거의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진정 고백해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순 없다. 그에게 불리한 증거가 딱 하나 남았을 뿐이다. 초상화. 그게 증거였다. 없애 버릴 것이다.

p343. 방 안으로 들어선 그들의 눈에 벽에 걸려 있는 눈부실 정도로 멋진 초상화 하나가 들어왔다. 그들 주인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였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젊은 주인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 놓은 것이었다. 

<역자 해설. 오스카 와일드의 두 개의 상>

p346. 그가 살았던 후기 빅토리아 시대는 자못 엄격한 듯 보이는 도덕주의, 위선적인 진지함과 엄숙함이 대중의 삶을 억누르던 시대였다. 

p349. 와일드는 자신의 작품을 비난하는 것은 그 작품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작품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비난하는 자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맞서기도 했다.

p350. 머리말에서 와일드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예술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 목적을 지니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이다.

p355.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자신이 그토록 되고 싶었던 존재이고, 헨리 워튼 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고, 바질 홀워드실제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한 바 있다.

끝.